[정의]
일제강점기의 사회운동가.
[생애]
1893년 진주에서 태어나 망경동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신영균, 어머니는 여산송씨이다. 사회운동으로 평생을 보냈으며, 1961년 68세로 사망하였다.
[학력]
1911년 진주제1보통학교(현 중안초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이후 일본에 있는 중학교를 수료하였다.
[경력]
1920년 전후 토지조사국에서 조선일보 진주지국장으로 옮겼으며, 이후 다양한 조직에서 사회운동을 하였다. 1921년 9월 진주저축계 발기인 감사로 선임되었으며, 1923년 1월에는 진주청년회를 조직하였다. 이해 3월 진주금주단연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4월에는 진주부업장려회에 참여하는 한편, 형평사조직진주공존회에 가입하였다. 그 후에도 진주공존회, 진주소유원, 진주기근구제회, 동우사 등에 참여했으며, 1923년 11월에는 친일세력이 참여한 진주면협의회 의원선거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1934년 『영남춘추』를 창간하였고, 1945년 이후에는 진주남중과 진주농고의 사친회장 및 기성회장을 역임하고, 천전초등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활동사항]
1923년 4월 25일 강상호(姜相鎬)·천석구(千錫九) 등 양반 출신 사회운동가 및 이학찬(李學贊)·장지필(張志弼) 등 경제력을 가진 백정들과 같이 진주에서 형평사를 창립하여 형평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형평사의 전국적인 확대와 더불어 혁신파와 보수파로 구분되었는데, 그는 경상도를 기반으로 한 강상호 등의 보수파에 속하였다. 보수파는 진주에 본사를 그대로 유지할 것을 주장하면서, 형평운동을 사회주의 노선에 입각한 계급해방운동보다는 인권운동으로서 유지시키려 했다. 그러나 형평사의 분열에 대한 사회적인 비난과 요구에 대해 수용하면서 1925년 4월 양파 합동으로 서울에서 전조선형평대회를 개최하게 되는데, 이때 형평사의 통일을 위해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참고문헌]
? 김중섭, 『형평운동』(지식산업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