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사의 일차적 목적은 백정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철폐하고 평등한 대우를 획득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그들도 인간으로서 똑같은 권리와 존엄성을 누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곧, 형평운동은 백정 해방운동이자 인권운동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형평운동은 ‘인권’ 문제뿐만 아니라 사원들의 집합적인 생활 향상을 도모하는‘공동체운동’이었다. 곧, ‘인간의 평등과 존엄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아울러 구성원들의 실질적인 욕구를 함께 충족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창립 당시에 채택된 ‘형평사 주지’에 잘 나타나 있다.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다. 연(然)함으로 아등(我等)은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야 우리도 참사람이 되기를 기(期)함이 본사의 주지이다……. 우리도 조선 민족 2천만의 1인이라. 애정으로 호상(互相) 부조하야 생활의 안정을 꾀하며 공동의 존영(存榮)을 기코자 자에 40여만이 단결하야 본사의 목적과 그 주지를 간명히 표방코자 한다."
이와 같이 “계급 철폐, 모욕적인 칭호 폐지, 교육 장려, 사원들의 상호 친목”이라고 형평사 사칙에 명기된 것처럼 형평사의 주요 활동내용은 전통적인 신분사회의 잔재인 백정 차별을 없애면서 아울러 급변하는 사회변동과정에서 백정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려는 것이었다.
우선, 백정들에 대한 사회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형평사 창립 직후 본사 간부들은 경남경찰국을 방문하여 호적부에 기록된 백정 신분의 표적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여 경찰국장이 하급기관에 삭제 명령을 내리도록 관철시켰으며, 신분을 상징하던 전통사회의 머리 모양을 없애기 위해 형평사 차원에서 집단 단발(斷髮)을 실시하기도 하고, 반말이나 모욕적인 칭호에 대해 적극 대항하여 평등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백정들의 공동체의식을 재건하고 결속력을 복원하여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활동으로서 교육을 장려하고, 사원끼리의 친목을 강조하며, 대대로 전래되어오던 산업의 기득권을 되찾으려는 활동을 벌였고, 사원들이 재해나 개인적인 질병을 겪거나 실업의 고통 속에 있을 때 서로 도울 것을 형평사 사칙에 명문화하였으며, 곤경을 겪는 사원들을 돕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규학교 입학을 적극 권장하는 한편, 정규 교육기관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였던 사원이나 사원 자녀를 위해서 야학이나 사설강습소를 설치하였으며, 또 사원 교양을 위해 잡지를 출판하면서 신문·잡지 구독을 적극 권장하거나 상식을 위한 강연회를 개최하여 구성원의 교양을 높이는 데 힘썼다.
이와 같이 기본적으로 백정신분 해방을 목표로 한 형평운동은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강조하는 보편적인 명분과 함께 참여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공동체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조선의 신분질서에 저항하여 백정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차별에 반대하는 인권운동’이며, 백정들의 직업과 단결력을 다시 일깨워 모든 사람이 살맛나는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공동체운동’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성격의 형평운동에 대한 사회 저항도 많았다. 대표적인 보기로서 형평운동을 반대하거나 백정 차별의 관습을 유지하려는 사람들과 형평사원들 사이의 충돌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다음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러한 충돌사건은 형평운동의 발전과 함께 크게 늘어났다.
연도 | 사건 수 |
1923 | 17 |
1924 | 10 |
1925 | 14 |
1926 | 14 |
1927 | 44 |
1928 | 60 |
1929 | 68 |
1930 | 67 |
1931 | 52 |
1932 | 31 |
1933 | 26 |
1934 | 27 |
1935 | 27 |
특히, 1927년부터 충돌사건이 급증한 것은 일상적으로 당해온 차별이나 편견의 굴욕적인 관습에 대하여 형평사원들의 저항이 거세어진 것을 반영하고 있다. 형평사원들은 일상생활에서 겪는 반말이나 모욕, 무시 같은 개인적인 차별 관습이나 학교 입학 거부, 장지 공유 거부와 같은 사회적 차별 관행에 적극 저항하였던 것이다.
차별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각 급의 형평사 차원에서 적극 대응하여 이 문제를 사원들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 구성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형평사 중앙총본부에서 하급기관에 차별 사례를 보고할 것을 명령하여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웠으며, 더 나아가 차별과 굴욕에 저항하지 않은 사원을 자체 내에서 처벌하도록 규정한 것도 더 적극적인 대응을 낳았다.
이와 같이 형평운동이 발전하면서 형평사원들의 인권의식이 높아지게 되고, 따라서 차별에 적극 저항하게 되면서 형평사원들과 반형평운동 세력 사이의 충돌이 늘어났다. 이처럼 형평운동을 통하여 사회 전반에 차별 철폐와 인권의식이 점진적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