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류작가 장성유의 문화기행 [1998년 뉴스피플 5월호] 백정해방운동 진원지 경남진주 형평사(衡平社) |
촉석루(矗石樓) 높은 누각에 기대어 앉은 채 나는 오랫동안 상념에 젖고 있었다. 남강을 거쳐오는 바람은 시원하기 그지없었으나,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아!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너무나도 유명한 詩 논개(論介)의 한 구절. 이는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1897~1961)가 피끓는 펜으로 대신했던 민족적 울분이었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晋州城)이 함락돼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주연을 베풀 적에, 만취된 왜장 케야무라를 껴안고 남강(南江)에 뛰어 들었던 의기(義妓) 논개. YMCA 구석진 방에서 일경(日警)의 눈을 피해 독립선언서를 영역, 해외로 발송하던 한 민족주의자에게 논개는 훌륭한 시제(詩題)가 되었으리라. 여기 위대한 시인을 부르는 또 하나의 시제가 있다. 한 민족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고자 했던, 처절하도록 눈물겹고 안타까운 '백정'(白丁)들의 이야기다. 남강은 치우침 없이 도도히 흘러왔건만, 인간에게는 '움직이는 도구'로 여겨지던 '비인간'(非人間)이 존재했다. 천민 중의 천민이었던 백정이 그들이었다. 삼국시대 이래 영남의 중심이었던 고도(古都)진주, 일제 치하였던 1923년, 그들은 이곳에서 형평사(衡平社)를 조직,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의 '인권선언'(人權宣言)을 외치며 분연히 일어섰다. '형평'이란 백정들이 고기를 달아서 파는 데 사용하는 저울대와 같이 평등하다는 뜻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인권은 시작된다" 나는 그렇게 읊조려 본다. 이 글은 백정과 그들의 조직인 형평사에 대한 것이지만, 결국 우리들 인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남강은 하염없는 하소연의 대상 촉석루를 찾는 사람이든 진주성을 찾는 사람이든, 이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인권조형물'을 만날 수밖에 없다. 진주성 바깥에 선 이 조형물은 세계 인권선언일에 맞춰 1996년 12월 10일에 세운 것으로, '형평운동 기념사업회'에서 세운 것이다. 백정해방운동의 발화점이 됐던 형평사가 시내 진주극장(당시 진주좌)에서 창립축하식을 가진 것이 1923년 5월13일, 무려 73년만의 일이었다. 평등을 지향하는 두 기둥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고, 가운데 '해탈문'이 있다. 천대받던 기억을 다 씻고 해탈의 문을 들어서 승천하라는 바람일까. 설명판에는 의미심장한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本良:사람이 본디부터 어질다는 뜻)이라' 형평사 창립 때 내세운 주지문(主旨文)의 첫 구절이다. 얼마나 냉철하고 이성적인 문장인가. 그러나 주지문 전문을 구해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과거를 회상하면 종일 통곡의 눈물을 금치 못할 바라'하고 주지문은 울먹이기도 하고, '결코 천대받을 우리가 아닐지라 직업의 구별이 있다 하면 금수(禽獸)의 목숨을 빼앗는 자가 어디 백정 뿐인가?' 하고 호통 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형평사의 '형평운동'(衡平運動)은 1935년 대동사(大同社)로 그 명칭을 바꿀 때까지 12년간 지속됐다. 이는 일제 식민통치 기간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사회운동단체로 기록된다. 또 조직된 지 1년만에 전국으로 확산, 진주에 본사를 두고 12개의 지사와 67개의 분사를 조직할 정도였다. 신분 차별과 나라를 빼앗긴 식민기간이라는 이중 구조 속에서 그들이 이룬 성과는 가히 장대한 쾌거가 아닌가. 희비애환에 몸부림치며 살다 갔던 수많은 백정들의 혼! 비록 백정들은 신분이 천해 성내에 거주하지 못하고 성밖에서 촌락을 이루고 모여 살았지만, 그들에게도 저 남강은 하염없는 하소연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인권 조형물'은 그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다. 더구나 진주의 맥이라 할 수 있는 남강을 바라보는 큰길가에 세워진 것은 더더욱 보통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암묵적으로 저질러 온 불평등한 인권현장을 비로소 백일하에 드러낸 것을 뜻하며, 인권에 대한 가시적 논쟁을 허용하겠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계급의 변호사를 자청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백정해방 앞장선 양반 강상호 형평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두 인물이 있다. 강상호(姜相鎬 1882∼1957)와 장지필(張志弼 1882~1970년대 중반). 강상호는 동아일보 초대 진주 지국장을 지냈으며, 3·1운동 진주대표 3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한 지식인이었다. 정삼품 통정대부의 벼슬을 한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난 양반이었으면서도 누구보다 백정해방에 앞장섰던 위인, 강상호. 호의호식할 수있는 유혹을 다 뿌리치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선택한 이탈리아의 성직자 '프란체스코'와 같은 인물에 비유해 보고 싶다. 진주성에서 내려다보면 현대식 상점들이 늘어선 가운데 초라한 하나가 보인다. 낯설어 보이는 그 기와집 한 채가 바로 강상호의 옛집이다. 40간 한옥의 번듯한 모습은 간 곳 없다. 형평사 운영자금을 마련하느라 한두 채 팔아버린 결과라 한다. 강상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상여는 형평장(衡平葬)이란 이름으로 치러졌다. 상여 뒤로는 그가 평생을 두고 사랑했던 백정과 바람에 휘날리는 만장(輓章)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고 한다. 형평사의 또 다른 주역 장지필은 백정이었다. 그는 29세 때 동경 메이지대학 법학과 3학년까지 다니다가 중퇴, 고국에 돌아와 총독부에 취직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도한'(屠漢)이라고 기재된 민적(民籍)을 차마 제출하지 못하고 강상호와 함께 백정해방운동에 뛰어 들었다. 1923년 5월2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그의 글은 백정으로 살아온 서러움과 통한을 잘 보여 준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려면 민적이 필요합니다. 도한 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면 곧 쫓아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자손손 귀머거리, 벙어리 되라는 말입니까? 이것이 우리의 죄악이라 할는지요" 지식인과 백정의 만남! 이 과감한 만남을 통해 백정해방운동은 조직적이고 가열 차게 번져 나갔으리라. 강상호의 아들 강인수(姜寅洙60)씨는 "제가 어릴 적 기억으로도 아버지가 항상 바쁘셨으며, 진지를 잡수실 때에도 항상 쫓기는 사람처럼 다리를 세운 채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잡수시던 생각이 눈에 선합니다”하고 당시 일본 고등계형사의 감시를 받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했다. 개화사상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과도기 때, 인권의 사각지대였던 백정 층에 관심을 기울였던 지식인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이 땅에 백정해방운동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 할 사실이 있다. 백정들이 신분해방을 부르짖고 일어선 것은,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사실상 제도적 계급차별이 철폐된 뒤라는 사실이다.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이 제시한 '노비문서 소각, 칠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개선'과 '백정 패랭이 탈거(脫去)' 조항이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문서상이었을 뿐이었다. 1898년 백정들은 비로소 민적에 오를 수 있었으나, '도한'이라는 붉은 글씨가 등재됨으로써 교육이나 사회 진출에 끈 장애를 겪어야 했다. 백정계급은 이미 사라졌으나 어디를 가서도 그들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일반인과 백정 동석예배가 불씨 한편 진주 최초의 교회인 봉래동 진주교회에서 일반인과 백정의 '동석(同席)예배사건'이 발생했다. 새로 부임한 라이얼 목사는 "하느님 앞에서는 만민이 평등하다"며 일반 신도의 불만에도 불구, 동석 예배를 강행했다. 처음엔 그들 사이에 차일을 쳤으나, 둘째 주부터는 차일마저 제거해 버렸다. 이렇게 되자 일반 신도들이 분개해서 일어났다. 그들은 쇠고기 불매운동을 벌려 백정의 생계를 위협했다. 진주시내를 떠들썩하게 한 이 '동석예배사건'은 49일만에 백정들이 굴복, 일반 신도들과 따로 예배보기로 하고 종결됐다. 조선왕조가 이어지는 동안, 백정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존재였다. 기와집에서 살거나 명주옷을 입지 못했다. 장례 때 상여를 사용할 수 없었고 가묘도 만들 구 없었다. 결혼식 때는 말이나 가마를 타지 못했고, 관복을 입지도 못했다. 백정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양반 자제가 앞에서 걸어오면 코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숙여 자신을 소인이라 칭해야 했으며, 상민의 집에 가서도 뜰 아래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존대어를 써야했다. 이런 신분적 굴종 속에서 백정해방운동이 일어나지 못했던 것은 백정들 스스로 자신의 천업(賤業)을 운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 문물이 들어오고 사회가 개방되면서 백정들의 의식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식들을 교육시켜 번듯한 직장에 다닐 수있게 하겠다는 의욕이 넘쳤다. 갑오개혁으로 제도적 신분차별이 철폐됨으로써 이제 그들에게는 가능성이라는 게 생긴 것이다. 이러한 일말의 가능성마저 짓밟히고 말았을 때, 백정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천부인권'(天賦人權)을 향한 휴머니즘의 눈물이었다. 이 시대의‘신형평운동’으로 계승해야 그렇다면 왜 하필 백정운동은 진주에서 일어난 것일까. 진주에만 백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진주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백정해방운동이 진주에서 처음 봉기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진주사람들은 '진주에는 진주정신(晋州精神)이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고려 신종 3년(1200년) 진주의 공사노비(公私奴婢)가 민권을 부르짖으며 일으킨 '고려민권항쟁(소위 정방의(鄭方義)의 난)', 조선 철종 13년(1862년) 진주의 농민이 봉기해 삼남 일대에 파장을 일으킨 '진주농민항쟁(소위 진주민란(晋州民亂))'에서 진주성을 둘러싼 임진왜란 때와 일제침략기의 의병 활동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진주인은 불의(不義)앞에서 늘 당당했던 것이다. 진주 형평사와 관련해서 일본의 수평사(水平社)를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일본의 수평사는 형평사보다 1년 앞서 조직돼 진주 형평사에 영향을 준 조직으로, 우리처럼 백정들이 신분차별을 거부하며 일어난 부락민(部落民)해방운동이었다. 일본은 지금도 오사카에 '부락해방연구소'가 있을 만큼 천민계급이 엄존하고, 인간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다. '세계경제대국'이라는 일본에서 그럴 수 있는가 하고 혹자는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른다. 그에 비해, 우리는 6·25 동란이라는 '민족 대이동'을 겪으면서 백정신분의 인식이 희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만일 이 땅에 전쟁이 없었다면, 백정들이 모여 살던 집단촌이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면, 일본처럼 우리 또한 백정에 대한 신분 차별을 계속하고 있지 않을까? 이제 이 땅에 백정 계급은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어떤가. 75년 전 진주의 백정들이 떨치고 일어나 외쳐야만 했던 '인권선언'이 필요 없는가, 진주에서 백정해방을 부르짖으며 일어났던 형평운동은 '신 형평운동'으로 계승돼야 할 것이다. 얼마 전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 방문중 국제인권연맹이 수여하는 '올해의 인권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 상은 부끄러운 우리들의 초상화이다 너무도 역설적이게, 그 인권상은 그가 대통령으로 당당하게 서기까지 얼마나 인권 유린으로 고통받아야 했는지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제, 짧은 이야기를 끝으로 이 글을 끝낼까 한다. 일본에 사는 한 백정이 방송국에 초대돼 인터뷰를 하게 됐다. 사회자는 그의 직업관에 대해 물었다. "저는 소를 잡으러 가면서 부처님 모시는 곳에 가서 꼭 절을 합니다. 비록 소를 잡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저는 저를 위해 살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손님, 바로 여러분을 위해 소를 잡습니다" 그는 또박또박 자신의 소견을 피력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는 사뭇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저는 살생자 입니다 그렇다면 이 방송을 보는 여러분 가운데 쇠고기를 먹은 사람은 간접 살생자 입니다" 그는 잠시 침묵한 뒤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 다 간접살생자인데, 어째서 백정만 나쁜가요? 나는 소를 잡되 쇠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문을 가지고 염불하는 여러분 입으로는 쇠고기를 먹어도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