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반인륜적이며 불평등한 신분제도가 없어지면서 백정이란 신분도 형식적으로나마 사라졌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의 차별 관습은 20세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1923년 형평사가 창립되자 전국의 백정 후손들이 열렬히 환영하며 참여한 것이나, 형평사 창립과 활동을 반대하는 일반인들의 반형평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난 것은 백정집단에 대한 차별 관습이 여전히 남아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진주의 역사적·사회적 조건이 작용하여 진주에서 형평사가 처음 시작된 것이다. 우선, 진주는 근대기의 변혁과정에 앞장선 선진지역이었다. 진주의 농민항쟁(1862년/철종 13년, 임술년)은 부정부패가 널리 퍼져 있던 19세기 중반에 농민반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출발점이었다. 또 진주는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삼남지방을 휩쓸 때 서부 경상남도의 중심적인 격전지였다. 이것은 ‘인내천(人乃天)’으로 상징되는 동학사상이 진주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1925년에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도청 소재지로서 경상남도의 행정 중심지요 학문 및 문화 중심지였던 진주는 새로운 문물을 빨리 받아들이며 역사 변화를 이해하기에 적절한 토양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1919년 3·1민족해방운동 이후 진주에서 사회개혁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20년에는 전국 최초로 억압받던 어린이들을 위한 소년운동 단체가 결성되었으며, 1922년에는 전국 최초의 소작인대회가 열려 1920년대 농민운동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1920년부터 시작한 고등학교 설립운동은 일제의 방해와 간섭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1925년에 선구적인 여성 고등교육기관인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오늘날의 진주여고) 설립으로 결실을 맺었다.
한편, 진주의 백정들 역시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고 있었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면, 1900년에 진주 백정들은 진주관찰사에게 차별을 없애고 다른 이들과 똑같이 관(冠)을 쓰게 해달라고 탄원을 올리기도 하였고, 1909년에는 호주 선교사들이 전파하는 기독교를 접하여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며 평등사상을 접하기도 하였다. 1910년에는 도축장에서 일하는 백정들 중심으로 조합 결성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백정들의 변화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억압도 여전히 강하였다. 1900년에 관찰사에게 올린 탄원서를 빌미로 일반 사람들이 백정 마을을 습격하기도 하였고, 1909년에 진주교회의 일반 신도들이 백정 신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면서 동석(同席) 예배를 거부하기도 하였고, 또 1910년의 조합 결성 시도는 일제의 방해와 다른 백정들의 무관심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을 겪으면서 백정들은 점차로 평등과 신분 해방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