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지역을 포함한 경상남도 지역에서의 기독교 시원은 직접적으로 호주장로교 선교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902년 커렐(Dr. H. Currell) 의사 부부는 의료시설이 전무하다시피 한 경상남도지방에서 의료활동의 시급성을 느끼고 진주지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커렐 의사 부부는 두 딸과 자신의 조수였던 박성애 부부와 함께 진주 성내면 4동에 초가집을 임시 거주지로 빌려 전도와 함께 의료·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결실로 그해 말인 1905년 11월 첫 주일 옥봉리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때 신자 수는 남자 20여 명과 부녀자 7명이었다. 1906년부터 옥봉리교회는 보다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인접 지역의 복음운동의 진원지로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일찍이 동학농민혁명군의 영향을 받았던 진주는 신분차별에 대하여 저항하는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갑오개혁과 더불어 백정들도 호적을 가질 수 있으며 관을 쓸 수 있게 되자 진주 백정들은 개혁안에 따라 차별적 관습을 없애달라고 관찰사에게 탄원하기도 했고, 또 상경하여 내부에 탄원하는 등 신분해방의 능동적 집단행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관습적 장벽은 너무 높아 사람들은 백정을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정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던 옥봉리에 교회가 설립되자 백정들도 하나 둘 신자가 되었다. 하나님 앞에 평등을 교리로 하는 기독교는 백정들에게 신분차별을 뛰어 넘는 계기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커렐 선교사는 백정들을 위해 그들의 거주지역에 옥봉예배소를 개설하여 옥봉리교회에서 보낸 신도로 하여금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이끌었다. 그러다가 1908년 10월 커렐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호주에 간 사이 후임으로 라이올 선교사가 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라이올 선교사는 옥봉리교회와 옥봉예배소가 지척 간에 있으면서 따로 예배를 드리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1909년 3월에 라이올 선교사는 하나님 앞에서는 귀천이 없으며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백정 신도도 옥봉리교회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예배를 올리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봉건적 의식을 가진 신도들은 백정 신도와의 합석 예배를 불가하다고 반대하였다.
1909년 5월 라이올 선교사는 백정 신자들을 옥봉리교회로 불러 동석 예배를 추진하였다. 이에 라이올 선교사의 뜻에 따르던 30여 명을 제외한 200여명의 신도들은 예배당을 나갔다. 이것은 당시 외국문물에 호의적인 기독교인조차 신분차별 관습이 얼마나 뿌리 깊고 강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옥봉리교회는 동석 예배 7주 만에 종전처럼 두 곳에서 따로 예배를 보는 것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이 일은 비록 초창기 개척교회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이었으나, 당시로 보면 백정과의 동석 예배는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던 백정들을 사람으로 인정한 일대 사건이며, 신분적 관습에 젖어있던 사람들의 격렬한 반발과 함께 지역 선각자들에게 인권운동의 중요성을 깨우쳐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백정들은 하나님 아래 모든 사람이 똑같이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으며, 14년 후 ‘저울[衡]처럼 공평한[平] 사회를 만들자’는 전국 최초의 근대적 인권운동인 형평운동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