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일제강점기의 사회운동가.
[자료사진]
[생애]
1882년 경상남도 의령의 백정 집안에서 태어나서 백정의 신분해방운동에 평생을 보냈다. 해방 후에는 우유업에 종사하다가 1970년대 중반 사망하였다.
[학력]
백정 신분 때문에 정식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독학으로 글을 익히며 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다가 20살을 전후해 진주에 살던 일본인 지주 겐지로의 도움으로 일본 메이지대학에 입학하였다. 법학을 전공한 장지필은 조선인 유학생들 가운데 발군의 성적을 보였으나 가정의 부득이한 사정으로 졸업을 하지 못하고 법학과 3학년 중퇴의 신분으로 귀국하였다.
[활동사항]
29세 때 일본에서 고국에 돌아와 조선총독부에 취직을 하려고 했으나 백정을 뜻하는 '도한(屠漢)‘ 이라고 기재된 민적(民籍)을 차마 제출하지 못하고, 1923년 형평사(衡平社) 설립에 참여하여 백정 해방운동에 뛰어들었다.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강상호(姜相鎬)·신현수(申鉉壽)·천석구(千錫九) 등 양반 출신 사회운동가들, 그리고 이학찬(李學贊)과 같이 경제력을 가진 백정들과 같이 백정도 참다운 인간이 되게 한다는 목적하에 형평사를 설립했다. 여기서 장지필은 형평사 초대총무로 취임하여 형평운동을 전국적으로 널리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창립 1년 만에 열린 1924년 2월의 형평사 전조선 임시총회에서 장지필은 서울파의 지도자로서, 형평사 중앙본부의 서울 이전을 주장하여 진주에 본부를 그대로 두자고 주장하는 진주파와 갈등을 빚다가 4월에는 서울에서 형평사혁신동맹 총본부를 발족시켜 독자적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1926년에는 고려혁명당사건으로 검거되어 투옥되었으며, 1928년 석방 이후 1935년까지 형평사운동을 지도하였다.
[참고문헌]
? 김중섭, 『형평운동』(지식산업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