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일제강점기의 사회운동가.
[가계]
본관은 진주. 호는 벽촌(僻村). 정3품 통정대부의 벼슬을 한 강재순의 4남 1녀 중 장남이다.
[생애]
1887년(고종 19)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넉넉한 경제적인 여건을 배경으로 신학문을 접한 후 일찍부터 사회운동에 눈을 돌렸다. 1919년 3·1만세운동 때는 진주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29명 중 한 사람으로 대구교도소에서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기도 하였다. 1957년 별세하였다.
[학력]
1910년 공립진주보통학교(현 중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진주공립실업학교(현 진주산업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일본인이 세운 경남진흥 측량학교에 잠시 몸을 담고 측량법을 배웠다.
[경력]
현 봉래초등학교 전신인 봉양보통학교를 설립해 신분차별 없이 학생들을 뽑아 가르쳤다. 공립진주보통학교와 진주공립실업학교 초대사친회장을 지냈으며, 동아일보 초대 지국장을 역임했다.
[활동사항]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신현수(申鉉壽)·천석구(千錫九) 등 양반 출신 사회운동가들, 경제력을 가진 백정 이학찬(李學贊) 등과 어울려서 백정의 인권운동을 위해 형평사(衡平社)를 설립했다. 형평사는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에 대한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상호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창립 1년 만에 열린 1924년 2월의 형평사 전조선 임시총회에서 형평사 중앙본부를 진주에 그대로 두자고 주장하는 진주파의 지도자로서 형평운동을 사회주의 노선에 입각한 계급해방운동으로 발전시키려는 서울파와 갈등을 벌였다. 그 후 형평사의 통합에 대한 사회여론의 압력으로 서울형평사와 진주형평사는 중앙총본부라는 이름으로 재통합하였는데, 그때 강상호는 은퇴를 선언하였다.
[상훈과 추모]
강상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장례는 형평장(衡平葬)이란 이름으로 치러졌다. 장례식 때 상여 뒤로는 그가 평생을 두고 사랑했던 백정과 바람에 휘날리는 만장(輓章)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참고문헌]
? 『발굴 한국현대사인물』1(한겨레신문사, 1991)
? 『진주시사』(진주시사편찬위원회, 1995)
? 김중섭, 『형평운동』(지식산업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