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오마이뉴스] 인권운동도 아니고 형평운동, 그게 뭐죠?

형평운동기념사업회 0 81
동북아 국제전쟁(임진왜란)에서 연전연패하던 조선 육군이 처음으로 크게 싸워 이긴 진주성 대첩과 논개의 투신. 동학농민전쟁에 앞서 일어난 1862년 진주농민항쟁. 일제 강점기에 일어난 인간평등 인권사상 '형평운동' 등.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하는 주요 사건이 왜 경남 진주에서 일어났을까.

궁금증은 경남 진주에서 나고 자란 진주원주민인 내게 베스트 셀러 'Why'만큼 현재진행형이다. 진주 출신도 아니면서 나보다 더 진주를 사랑하고 자랑하며 '왜 진주에서 형평운동이 발생'했는지 연구하고 책을 쓴 이가 있다.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김중섭 교수다.
 
34년간 형평운동을 연구하고 <형평운동> 책을 쓴 김중섭 교수(경상대학교 사회학과)에게 현장에서 강의 듣는 시민들.
  34년간 형평운동을 연구하고 <형평운동> 책을 쓴 김중섭 교수(경상대학교 사회학과)에게 현장에서 강의 듣는 시민들.
ⓒ 김종신



지난 2일 진주문화연구소는 <형평운동>의 저자이자 34년간 이를 연구한 김중섭 교수를 길라잡이 삼아 '진주문화의 자취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형평운동 유적지를 둘러봤다. 이날 현장 답사에는 시민과 학생 50여 명이 함께했다. 우선 일반인 신자들이 '백정들과는 같은 곳에서 예배 볼 수 없다'고 한 일이 일어난 진주교회에서 형평운동에 관한 김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그 뒤에는 교회 유물전시관을 시작으로 백정들이 쇠고기를 잡아다 바쳤던 향교 근처와 집단 거주지, 백정은 아니지만 더 백정을 사랑한 형평운동가 강상호 선생 묘소 등을 둘러보았다.
 
형평사 제6회 정지 전국대회(1928년) 포스터
  형평사 제6회 정지 전국대회(1928년) 포스터
ⓒ 김종신


형평운동은 이른바 사람이지만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던 '백정'을 해방하고자 했던 인권운동이다. 백정은 고려 시대에는 일반적인 농민을 가리켰지만 조선 시대에는 가축을 잡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태어나도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충이나 효니 예니 하는 글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지을 수 없어 돌 석(石), 이름 돌(乭), 가죽 피(皮)를 사용해야 했다.

죽을 때에는 상복과 지팡이도 사용 못하고 삼베와 두건만을 사용해야 했다. 상여도 금지되고 자신들만의 격리된 곳에 묘지를 따로 만들어야 했다. 그들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각종 차별을 받았다. 나이가 아무리 많은 백정도 어린 아이에게 존댓말을 사용해야 했다. 나치 독일 때 유대인들이 가슴에 별을 단 옷을 입었듯 남자는 상투를 틀지 못하고 여자는 비녀를 꽂지 못했다. 한눈에 봐도 백정임을 드러내야 하는 억압과 차별을 500년 동안 받아왔다.

이런 억압과 차별 속에 신음하던 천민 백정들은 1923년 직접 '저울'(저울대 형(衡), 평평할 평(平))처럼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형평사'를 조직했다. 1935년에 이름과 성격이 바뀌기까지 13년간의 인권 운동이 일어났다. 한때는 전국의 단위 조직체가 162개, 활동가는 9688명에 이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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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일반인 신도가 백정들과는 동석 예배를 할 수 없다고 한 진주교회에서 시작해, 당시 백정들이 쇠고기와 가죽을 갖다 바쳤던 향교와 집단적으로 거주지, 형평운동기념탑, 형평운동가 강상호 선생 묘소 등 7군데 현장을 다녔다.

1905년 호주 장로회 소속 의료 선교사 카를(한국명 거열휴) 목사가 세운 진주 봉래동 진주교회(당시 옥봉리교회) 일반 신도들이 백정들과 함께 예배 보는 것을 반대해, 백정들은 따로 예배를 보았다. 1909년 카를 목사 후임으로 온 리알(한국명 나대벽)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는 귀하고 천한 이가 없다"며 "백정들도 일반인들과 함께 예배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일반인들과 백정들은 함께 동석 예배를 하도록 했다.

하지만 목사의 뜻을 따르던 30여 명의 신도들을 제외한 나머지 200여 신자들은 동석 예배를 거부하고 예배당을 나가 버렸다. 결국 7주가 지난 뒤 종전처럼 일반인과 백정이 따로 예배보는 것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백정들에게 좌절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일반인들과 함께 예배를 보지는 못했지만 하느님 앞에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상을 확인했다. 이는 백정들에게 똑같은 인간으로 대우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하고 14년 후 형평운동으로 발전하게 됐다.
 
진주성 촉석문 앞에 서 있는 형평운동 기념탑. &lt;형평운동&gt; 책 표지이기도 하다.
  진주성 촉석문 앞에 서 있는 형평운동 기념탑. <형평운동> 책 표지이기도 하다.
ⓒ 김종신


진주성 촉석문(동쪽에 있는 문) 앞에는 진주를 비롯해 전국 각지 1500여 명의 후원으로 1996년 12월 10일 세계인권 선언의 날 세워진 기념탑이 서 있다.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愛情)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라.

1923년 4월 24일 이 곳 진주에서 '저울(衡)처럼 공평(平)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 선각자들이 모여 형평사(衡平社)를 창립하였다. 형평사는 각지의 성원에 힘입어 전국 조직으로 자라면서 1935년까지 평등 사회를 이루려는 활동을 펼쳤다.

멸시와 천대에 시달리던 백정들과 그들의 처지에 공감한 분들이 힘을 모아 펼친 형평운동은 수천 년에 걸친 신분 차별의 고질을 없애려는 우리 나라 인권 운동의 금자탑이다. 누구나 공평하게 인간 존엄을 누리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사회를 만들자던 형평운동의 높은 이상은 오늘날 아직도 이루지 못한 인류의 꿈으로 남아 있어서 그때의 운동이 더욱 돋보인다.

이제, 70여 년 전 어둡고 힘겹던 시절에 거룩한 인간 사랑의 햇불로 타올랐던 형평운동의 정신을 드높혀 기리고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기를 바라면서 뜻있는 분들의 열의와 정성을 모아 유서 깊은 진주성 앞에 이 탑을 세운다.'

기념탑을 제작한 조각가 심정수의 해설에 따르면, 이 탑은 '두 줄기의 나란한 기둥'이 '영원한 평등과 자유의 정신을 높이 찬양'하며 서 있다. 앞으로 우리 모두는 '평등의 문'을 넘어 평등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세계가 될 것이다.
 
진주 새벼리 언덕에 아무 표지 없이 오랜 세월 쓸쓸히 누워 있던 형평운동가 강상호 묘지 앞에는 그의 정신과 용기를 기리는 이름 모를 시민에 의해 비석이 세워지기도 했다.
  진주 새벼리 언덕에 아무 표지 없이 오랜 세월 쓸쓸히 누워 있던 형평운동가 강상호 묘지 앞에는 그의 정신과 용기를 기리는 이름 모를 시민에 의해 비석이 세워지기도 했다.
ⓒ 김종신



새벼리 언덕에 아무 표지 없이 오랜 세월 쓸쓸히 누워 있던 형평운동가 강상호 묘지 앞에는 그의 정신과 용기를 기리는 이름 모를 시민에 의해 비석이 세워지기도 했다.
 
형평운동 기념탑
  형평운동 기념탑
ⓒ 김종신



형평운동은 우리 근대사상 최초의 인권운동이었다. 우리가 지금 곧잘 사용하지만 '인권'이라는 말조차 낯설던 시절,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을 운동으로 실천한 최초의 용트림이다. 오늘날에는 '백정'은 없다. 직업과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다른 모습의 차별이 존재한다. 남성과 여성은 물론이고 재산이 많고 적음, 피부색과 언어, 장애 여부 등에 따라 차별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형평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게 오늘 답사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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