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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사
작성자 남간사
작성일 2009-02-13 (금) 12:57
ㆍ조회: 981      
형평운동의 사회적 배경
 

백정들이 작업할 때 쓰는 저울의 상징적 의미를 활용하여,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추구한 형평사는 활동 목표나 활동 주역의 측면에서 백정들의 사회 지위나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엄격한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조선의 신분사회에서 최하층 천민에 속하였던 백정들은 대대로 가축을 잡는 일을 하거나, 가죽제품이나 버들고리가구나 생활용품을 만들어 파는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은 노비나 무당 등 다른 천민들보다도 더 낮은 대우받았던 탓으로 천민 중의 천민이라고 여겨졌다.

백정들이 겪는 차별은 그야말로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갖가지 유형으로 나타났다. 첫째, 거주지역의 제한을 받았다. 조선시대의 최대 법전인 『경국대전』에서 규정하듯이, 그들은 일반인들과 섞여 살지 못하고 일반인 마을 밖에서 모여 살았다. 둘째, 옷차림이나 집안치장 같은 외모에서 차별을 강요받았다. 백정들은 일반 사람들처럼 갓을 쓰거나 상투를 틀지 못하고, 두루마기를 입을 수 없었으며, 갓끈도 대나 구슬, 베조각을 쓰지 못하고 종이 꼰 것만 써야 했다. 그리고 모자는 일반인들이 부모상(喪)을 당하였을 때 쓰는 평량자(平凉子 : 패랭이)를 써야 했다. 가죽신을 만드는 것이 직업이면서도 비단옷이나 가죽신을 신을 수 없었고, 그 대신 짚신이나 헝겊신을 신어야 했다. 집안단장에서도 차별을 받아 가옥에 채색을 할 수 없었고, 기와도 올릴 수 없었다. 또한 다른 천민들처럼 성(姓)이 없었던 백정들은 이름을 지을 때에도 차별을 받았다. 인(仁)·의(義)·효(孝)·충(忠)과 같은 고상한 글자를 쓸 수 없었고, 그 대신에 석(石)·피(皮)·돌(乭)과 같이 좋지 않은 뜻의 글자를 사용해야 했다. 셋째로, 백정들은 일반사람들과의 개인적인 교제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백정들은 아무리 나이 어린 일반인이라도 존댓말을 써야 했으나, 일반인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백정들에게 반말로 대꾸했다. 백정들은 일반인들과 나란히 걷지도 못했고, 일반인 집에 갈 때는 무릎을 꿇고 들어가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또 백정들은 일반인들과의 결혼이 엄격하게 금지되었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배우자를 선택하였으며, 결혼식에서도 백정 신랑과 신부는 일반인들처럼 안장 놓인 말이나 가마를 탈 수 없었다. 백정 여자들은 성인의 표시인 비녀를 꽂지 못하고 둘레머리를 해야 했다. 백정들은 장례를 치르면서도 일반 사람들처럼 상여를 이용하지 못하였고, 부모상을 당하여도 삿갓이나 베옷을 이용할 수 없었고, 묘지는 일반 사람들의 것과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조상에 대한 예를 엄격하게 강조하는 조선사회에서 묘지의 위치에도 신분 차별이 반영되었던 것이다. 넷째, 백정들은 관청의 일처리과정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조선 후기까지 호적에도 올라가지 못하였고, 공적인 직책을 갖거나 공적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호적도 없이 국가 구성원의 일원으로 대우받지 못한 탓에 납세나 국방의 의무도 없었다. 그러나 북방에 적이 쳐들어오면, 백정들이 용맹스럽고 전투기술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징집되는 경우는 있었다.

차별 관습에 저항하거나 어겼을 때 백정들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일반인들은 농청(農廳)과 같은 마을 내의 규율 유지 조직을 통하여 관습을 어긴 백정들을 불러다가 집단적으로 사형(私刑)을 가하였고, 심지어 지방 관청도 사회질서를 깨뜨렸다는 죄로 처벌하였다. 관청의 처벌방법도 달라 일반 죄수들은 곤장대 위에 올려놓고 때렸는데, 백정 죄수들은 곤장대도 없이 맨땅 위에서 때렸다. 이처럼 조선사회에서 백정들은 마치 인도의 ‘불가촉민(不可觸民, the untouchables)’이나 일본의 부락민(部落民)처럼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격리되어 차별을 받았던 최하층의 사회적 피차별 집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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