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을 존중하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형평운동기념사업회▒

ㆍ작성자	남간사
ㆍ작성일	2009-06-29 (월) 18:49

ㆍ추천: 0 ㆍ조회: 1809

여전히 핍박받는 이름만 달리한 백정들-경남도민일보20030430
[칼럼]홍창신-형평운동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

히말라야, 배롱나무 둥치처럼 몸을 꼰 요가, 정신의 저 높은 곳에 도달한 구루, 마하트마 간디, 갠지스 강, 노란 밥 카레…. ‘인도’하면 떠오르는 그림들이다. 이 나라에 잘난 이들 치고 인도여행기를 쓰지 않은 이가 없고 그 여행기에는 하나같이 인도예찬이 늘어졌기에 그런 것들이 은연중 학습되어 내 가난한 메모리에 내장된 것이리라.

그것은 지독한 가난과 열악한 생활 환경 속에서도 ‘먹이’에 매달리거나 삿된 것들에 끄달리지 않고 오로지 신의 가호와 불멸의 내세를 꿈꾸는 드높은 정신이 지배하는 나라 ‘인도’에 대한 동경이 낳은 것이기도 하였다.

고상하면서도 밥술마저 제대로 먹는 주변의 사람들 또한 인도 한번 다녀오지 않으면 ‘고상함’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다는 조바심이 있는 듯하고, 고상하지만 ‘밥술’에 문제가 있어 여태 그 정신의 나라에 가보지 못한 나는 그놈의 밥술을 자책하는 편이었다.

거구의 인도 아지매 ‘부나트 화티마 나티산’은 진주의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1923년 진주 백정들의 결사체 ‘형평사’의 창립 8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개최한 초청강연회 ‘차별받는 사람들의 증언’의 초청연사로 진주에 왔다.

빡빡한 일정에다 제한된 시간일 수밖에 없었는데, 일본의 부락해방연구소도 참여하는 학술회의와 강연회였기에 신통찮은 인도식 영어로 그녀가 말하면 동석한 일본인들을 위해 먼저 일어로 통역하고 그 다음에사 국어로 통역되었기에, 내 귀에 그녀의 말이 꽂히는데 걸리는 시간은 여기서 인도만큼이나 멀었다. 인도라는 나라 참 기가 막히는 나라였다.

‘카스트’라는 제도는 일찍이 세계사 시험에 단골로 출제되는 것이었으니 낯설지 않고 ‘불가촉천민’ 이란 단어도 그 생김새의 특출함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수요나 실상이 이렇게 엄청나고 얼측없는 것임이사 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낮에는 만질 수 없고 밤에만 만질 수 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그 잘난 인도의 네 개의 계급에 속한 이들을 만질 수도 없고 접근할 수도 없는 불결한 존재인 불가촉천민 ‘달리트’ 여성들을 밤에는 마음껏 유린한다는 말이다.

놀랍지 않은가. 21세기의 하늘 아래 사람의 형상을 지녔을 뿐 짐승처럼 취급당하는 이들이 자그마치 1억6000만명이나 되는 나라가 있다는 것이. 그녀가 늘어놓는 참혹한 실상을 듣고 인도라는 나라 정내미가 구만정이나 떨어졌다. 과연 인도는 정신이 있는 나라인가. 나는 그 날밤 인도와 그 더러운 나라를 예찬한 더러운 입들을 게거품을 물며 욕질하였다.

수 만리 건너 남의 삶을 탓하고만 말 일인가? 그들의 문제를 들으면서 우리를 들여다보는 것이 이번 초청토론과 학술회의의 목적이었다면 그 성과로 보다 냉정한 자기응시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영양가 있는 ‘실천운동’으로 새로운 가닥을 잡은 지방 도시의 이 작은 모임이 여물어지려면 만만치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 백정은 없다. 다만 그 이름을 달리했을 뿐 아직도 냉혹한 차별에 고통받는 수많은 이 시대의 백정이 있을 뿐이다.

외국인 노동자, 동성애자, 장애인, 이 지역의 변방에 머물며 차별에 시달리는 오늘날의 ‘백정’들과 고통을 함께 하며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구체적 대안제시를 하여야 할 것이다.

단 한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만 있다 하더라도 이 모임의 존재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